전시경력

전시명 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
전시기간 2013-01-29 ~ 2013-06-30
전시장 백남준아트센터 1층
기획
1960-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구 세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며 기존의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은 문화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남준을 비롯한 일련의 아티스트들은 대다수의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매체인 비디오를 사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비디오는 부조리한 세상에 도전하는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부드러운 교란 - 백남준을 말하다》전은 백남준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치적이라고 평가 받는 비디오 작품 <과달카날 레퀴엠>에서 출발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섬을 소재로 한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전쟁의 파괴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저항을 담아냈다. <과달카날 레퀴엠>은 1977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감옥에서 정글로>라는 공연의 일부로 처음 상영되었는데 여기에서 감옥은 샬롯 무어먼이 1967년 옷을 벗은 채 첼로를 연주했던 작품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의미한다. 백남준은 음악 분야에서 금기시되던 성(性)을 전면에 내세워 클래식 음악이 성스러워야 한다는 통념에 저항한 것이다.
<과달카날 레퀴엠>을 통해 전쟁에 대한 기억과 트라우마가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상처임을 환기시키면서 백남준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비디오 작업으로 부드러운 교란을 도모한다. 본 전시에서는 백남준의 부드러운 교란을 보여주는 <과달카날 레퀴엠>,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와 함께 백남준에게 정치적인 예술이란 무엇인지, 사회 참여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과 자료들이 소개된다.
전시개요
I. 두 스승: 마르크스와 쇤베르크
백남준의 급진적인 태도는 어린 시절 정신적 스승이었던 칼 마르크스와 아놀드 쇤베르크를 통해 형성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한국에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함께 신사상이 밀려들어왔다. 기존의 음계를 파괴한 쇤베르크의 독창적인 음악 양식과 자본과 계급의 타파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도 그러한 사상들 중 하나였다. 경기공립중학교에 다니던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 백남준은 한동안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또한 쇤베르크에 대한 현대음악 서적을 읽으며 극단적인 아방가르드에 매료되었다. 백남준은 작곡 공부를 시작한 1940년대 후반 김소월의 시를 소재로 한국의 민속음악과 유사한 양식의 곡들을 썼으나 이후 쇤베르크의 영향으로 무조(無調)음악을 작곡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쓴 “59세의 명상록”, “샬롯 무어먼: 우연과 필연” 등의 글에서 그는 마르크스 사상을 옹호한 지식인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순진했고 바보짓을 저질렀다고 말한 바 있다.

II. 음악과 성
쇤베르크의 영향으로 음악 공부를 하기 위해 1954년 독일로 건너간 백남준은 사회의 변화를 미리 파악하고 경보를 울리는 예술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쇤베르크처럼 음악의 형식을 새롭게 하는 일보다는 어떻게 강렬함을 잃지 않고 다양한 변화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성(性)을 주제로 한 그의 작곡과 퍼포먼스는 기존의 사회 질서와 기성 예술계에 충격을 가하기 위한 행위였다. 백남준은 문학과 예술에서 성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지만 음악에서는 금기시되는 이유에 대해 반문하며 전통에 도전하는 교란 장치로 성을 사용하였다.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을 만난 이후 백남준은 본격적으로 성을 다룬 음악 퍼포먼스를 펼쳐 나갔다.

III. 감옥에서 정글로, 1967-1977
백남준의 작품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전구로 만든 비키니를 입고 첼로를 연주하던 샬롯 무어먼은 옷을 하나씩 벗으며 마지막에는 전라로 폭탄을 연주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연 도중 무어먼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퍼포먼스는 중단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로 불렸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10주년을 맞이하여 백남준은 197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감옥에서 정글까지>라는 공연을 기획했다. 이 공연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의 재공연, 당시 법정의 재구성, 그리고 <과달카날 레퀴엠>의 시사회로 구성되었다. <감옥에서 정글까지>에서 감옥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로 무어먼이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정글은 제 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였던 과달카날섬의 정글에서 촬영한 <과달카날 레퀴엠>을 의미한다.

V. 부드러운 균열: 제도의 안과 밖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이후 백남준의 작업 반경은 예술계를 벗어나 방송국으로 확장되었다. TV를 이용한 백남준의 작품을 눈여겨본 보스턴의 공영방송 WGBH의 관계자는 백남준과 그의 동료들에게 비디오 프로그램의 제작을 제안하였다. 이들이 만든 옴니버스 비디오 <매체는 매체다>는 미국에서 처음 제작된 방송용 비디오 아트 프로그램으로 1969년 WGBH를 통해 방송되었다. WGBH는 <매체는 매체다>의 성공을 계기로 예술가들이 방송국과 협력하여 비디오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었다. 백남준은 일방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존의 TV 프로그램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언어와 국가의 장벽을 넘어 소통하게 되는 ‘비디오 공동시장’을 꿈꾸었다.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방송국이라는 제도 안에서 지원금을 받으며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를 회상하며 백남준은 방송국과 협업하면서 좌절도 많이 했지만 그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다.